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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가족이 소와 함께 먼 길을 떠나는 그림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미술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조선인 서양화가 이중섭은 한국인을 빛낸 100명의 위인의 가장 마지막에 언급되는 인물이다. 굵고 강력한 선으로 화풍으로 격동의 근대사 속에서 민족의 자긍심,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피난민으로 머물렀던 서귀포에 위치한 그의 생가 옆 이중섭 미술관의 상시 전시를 통해 그가 남긴 한국 근대사의 예술적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관람 정보]

-. 관람 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 입장권 : 정가 1,500원 (개인 어른 기준)
-. 홈페이지 : 이중섭미술관

 

이중섭미술관 관람안내

이중섭특별전 1부 <들소처럼> 기간 2023.03.07 ~ 2023.08.27

culture.seogwipo.go.kr

 

1. 국민 화가, 이중섭 그는 누구인가?

소의 화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 교과서 인물이라고도 알려진 이중섭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나, 불안정한 근현대 시기와 6.25 전쟁을 몸소 겪으며 느낀 한민족의 애환과 향토 문화를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 속 서명은 한글 자모로 만든 그의 이름으로 대체했는데, 이것 역시 당시의 일제 강점기로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피난민이었든 그의 가족이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섬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종종 에메랄드 빛의 해안 풍경, 무성한 푸른 들판, 그리고 "한옥"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제주 집들을 묘사했다. 그의 뛰어난 붓놀림을 통해, 그는 제주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활기찬 색과 질감으로 그의 예술에 영향을 주었다. 제주도는 이중섭의 예술적 유산을 기리며, 그의 작품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서귀포 해안가에 있는 그의 생가 옆에는 그의 이름을 본떠 지은 미술관을 통해 보존된 그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2. 한민족을 상징했던 소 그림 

이중섭의 소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10대의 소년인 그에게 삶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존재이자, 당시 소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다. 소는 거대한 덩치를 지녔으나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화가 나면 그 무엇보다 사나워진다는 점을 가지고 일본인들이 비유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오산학교에서 만난 미술 선생님이자 독립운동가인 임용련 선생님을 통해 민족 교육과 미술 지도를 받을 당시,'조선인은 조선인다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받아 더욱더 많은 소와 관련된 작품을 그렸다. 한국 예술에서 소가 두드러지는 한 가지 이유는 오랫동안 한국 경제에 필수적인 농업과 농업과의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는 밭을 경작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많은 한국인들의 생계와 번영의 기반을 보여주었다. 추후, 이중섭은 당시 보수적인 일본의 미술전에 출품할 때도 강력한 색감을 담은 「황소」를 제출했으며, 대표작 「흰 소」를 통해서도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한민족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과 강인한 민족성을 표현했다. 이중섭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소의 묘사는 또한 더 깊은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는 전쟁과 식민지화를 포함하여 역사를 통해 수많은 고난에 직면한 한국인의 끈질긴 정신을 보여준다. 소의 회복력과 힘은 도전을 극복하고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한국인의 인내와 결단력을 반영한다.

 

 

3. 그리운 아내, 아이들 그리고 '끈'의 의미

일본 유학시절 마사코 여사를 만나 가정을 꾸리며 가장이자 아버지가 된 그는 아이들의 그림 폭에 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민 신분으로 떠돌이 신세가 된 그와 가족이지만 아이들의 표정만 큼에서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중섭에게 있어서 피난살이와 처한 현실은 막막했으나,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에서 해변을 거닐고, 게를 잡고, 모래밭을 뒹구는 것은 가장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이들을 그린 그림 속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과, 피사체들을 묶어놓은 '끈'이다. 전문가들은 이는 그림에서라도 아이들과 대면해 눈 맞춤을 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속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의 작품 속 끈은 서로가 인연으로 얽힌 존재임을 의미하며,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의식을 '끈'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혼란한 시대 속 전쟁을 몸소 겪고 또 예술로 승화한 위대한 화가였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인생만을 보자면 어찌 보면 쓸쓸하고도 가난에 힘겨웠던 삶을 살았다. 살아생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고, 일생에 단 1번의 열었던 개인 전시회마저 실패로 끝났었다. 오늘날 그의 많은 작품을 관람했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일본으로 간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이다. 손 편지 양옆 빈칸 속에는 그는 네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 가족을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 등 자신의 감정을 가득 담아 전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쓸쓸히 많은 작품을 남긴 채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던 천재작가를 기억하며 글을 마친다.